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누스 1세 (문단 편집) == 개요 ==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 중 한 명으로, [[밀라노 칙령|그리스도교 공인]]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로 인해 후세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황제. 어느 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이름이 최소 한 번은 무조건 나온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체제를 재정비하여 제국의 수명을 1,000년 이상 연장한 업적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서방과 동방의 통일된 형태로서 장기간 존속하지 못한 것은 내외부적 문제가 겹친 결과일 뿐이고, 당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1, 2세대 정도는 세계가 온전히 재건된 것으로 여겼다.[* 사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60여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진 것이고,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관례에 따라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두 아들에게 통치구역을 나누어준 것일 뿐 로마의 분열을 바라고 그런건 아니었다. 따라서 빠른 로마의 분열을 콘스탄티누스의 탓으로 볼 순 없다.] 처음으로 대제 칭호를 얻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마누일 1세|마누일]]] 중 하나며,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 [[합성론]] [[교회]]들] 및 [[경교]]에서 [[성인]]으로 [[시성]][* 성 콘스탄티노스 대제,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하기도 한 황제다. [[사두정치]]의 혼란으로 내전에 빠졌던 제국을 평정했고 옛 비잔티움 자리에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 유명해진 [[이스탄불|노바 로마]]를 건설했다.[* 학자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의 시초를 이때로 잡기도 한다.] 후에 제국 서쪽이 몰락하는 일 때문에 이를 로마를 버리고 수도를 천도한 것으로 연상하기 쉽지만, 콘스탄티누스가 노바 로마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온 힘을 기울여 건설하긴 했어도 이 시대까지도 로마시의 중요성과 상징성은 콘스탄티누스가 아니라 누가 와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조차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와 동급으로 격상시켜 특별시장(Praefectus Urbi)을 두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을 로마 원로원과 동격으로 올렸을 뿐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행정수도였을 뿐이다. 또한 사두정치 시절이나 리키니우스와의 동서 분할통치 시절 콘스탄티누스의 지위는 '''서방''' 부제 또는 정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존재 때문에 동방을 연상하기가 쉬운데, 그는 서방에서 시작해서 동방을 병탄 및 흡수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어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대립으로 기독교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니케아 공의회]]를 열었고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세계에서 [[대제]](大帝)와 [[성인(기독교)|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